Contents

[회고] 2025 한해를 마무리하며

   Dec 29, 2025     15 min read     - Comments


추락의 시간들

“2023년 어느 날, 나는 회사 회의실에 앉아 있었다. CTO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귀에 들어왔다.

“사업 정리”, “팀 해체”, 그 단어들은 공기 중에 떠다니다가 하나씩 내 가슴에 박혔다.

잘하고 싶었다. 정말 잘하고 싶었다.

매일 아침 자전거로 출근..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팀이 사라진다니.

내가 쏟아부은 시간들이, 노력들이, 열정들이 한순간에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 같았다.

회의실을 나와 화장실로 향했다. 거울 속의 내 얼굴은 창백했고, 눈가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수도꼭지를 틀어 찬물로 얼굴을 씻었다. 차가운 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속은 여전히 뜨거웠다.

분노인지, 슬픔인지, 당혹감인지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방향을 잃었다. 점심시간에 혼자 걷다가 문득 ‘내가 지금 뭐하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밤에는 잠이 오지 않아 천장만 바라보다 새벽이 되는 날들이 이어졌다.

이력서를 쓰고, 면접을 보고, 거절 메일을 받고, 다시 이력서를 쓰는 일상이 반복됐다.

그렇게 몇 달을 헤맸고, 새로운 회사에 자리를 잡았다.

새로운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이번에는 더 잘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또다른 충격

2024년의 어느 아침, 나는 평소처럼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아니, 눈을 뜨려고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천장이 빙빙 돌았다. 마치 회전목마를 타고 있는 것처럼, 아니 더 심하게, 세탁기 안에 들어간 것처럼 세상이 돌아갔다.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중심을 잡을 수 없었다.

속에서 무언가 올라오는 느낌에 화장실로 기어갔다. 헛구역질이 났다. 토할 것도 없는데 몸이 계속 무언가를 토해내려 했다.

‘뭐지? 이게 무슨 일이지?’

119에 전화를 걸려다가 멈췄다. 조금 있으면 괜찮아지겠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증상은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벽을 짚고 천천히 현관문까지 나가 택시를 불렀다.

이빈후과 의사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돌발성 난청과 이명 증상이 보이네요. 메니에르병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정밀 검사를 받아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청력 검사실에 앉아 헤드폰을 쓰고 삐 소리가 들릴 때마다 버튼을 눌렀다.

왼쪽 귀에서는 소리가 잘 들렸다. 하지만 오른쪽 귀는 달랐다.

어떤 소리는 들렸고, 어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점점 높아지는 주파수의 소리들은 마치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희미했다.

좀더 큰병원으로 가셔야할것같다고..

큰병원으로 갔다

검사 결과가 나왔다. 의사는 모니터 화면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한쪽 귀의 청력이 영구적으로 손상되었습니다. result

  • 청력 검사 결과지

그 후 며칠간 병원을 오가며 여러 검사를 받았고 다량의 스테로이드약제.. 를 1주일간 먹었다..

거의 마지막날

완전히 들리지 않는 건 아니지만, 예전의 조금 좋아지긴하겠지만 50 퍼센트 밖에 안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지금 귀에서 소리가 들리시나요?” 의사가 물었다.

“네. 삐 하는 소리가 계속 들려요.”

“그게 이명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들릴 겁니다. 시간이 지나면 조금 익숙해질 수는 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거예요.”

병원 복도를 걸어 나오며 귀에 손을 가져다 댔다.

삐~ 소리는 여전했다. 조용한 복도에서도, 거리의 소음 속에서도, 그 소리는 항상 거기 있었다. 내 귓속에서, 끊임없이.

그래서 시간이 흐르고 지금은..

그래서 현재는 80퍼센트. 100퍼센트가 아닌 80퍼센트. 20퍼센트를 잃어버렸다는 말이었다. 영구적으로.

그날 이후 세상이 달라졌다.

카페에서 친구들과 대화를 나눌 때, 예전에는 자연스럽게 들리던 말들이 이제는 집중해야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특히 시끄러운 곳에서는 더 심했다. 주변 소음과 대화 소리가 뒤섞여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 어려웠다.

회의 시간에는 오른쪽에 앉은 사람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아 고개를 돌려야 했다.

영화관에서는 오른쪽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가 희미해 몰입이 안 됐다. 그래서 가기싫다.

음악을 들을 때도 양쪽 귀로 듣던 풍성한 사운드가 이제는 반쪽만 들렸다. 묵직한 둔탁음같은.

예전에는 고요함이 편안했다. 하루의 소음에서 벗어나 잠들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조용해질수록 귓속의 이명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삐—. 그 소리는 밤마다 나를 괴롭혔다.

그렇게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했다.

시끄러운 곳을 피하고, 조용한 곳을 찾고,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말해달라고 부탁하고, 영화는 자막이 있는 것을 보고, 음악은 볼륨을 높여서 듣고.

이 모든 것들에 적응하는 법을.

떠나자

2025년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다. 새 회사에 적응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모든 게 낯설었다. 사람들도, 업무 방식도, 회사 문화도.

매일이 전쟁 같았다. 마음은 계속 무거워졌다. 멈추지 않고 달려왔다.

지금까지, 단 하루도 쉬지 않고. 회사 문제로, 건강 문제로, 적응 문제로. 쉬지 않고 달리다 보니 마음 어딘가에는 상처들이 쌓여갔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 소파에 앉으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언제 쉬었던 걸까? 나 자신에게 휴식을 준 적이 있었던가?’

생각해보면 한 번도 없었다.

학창 시절에는 공부 좋은 대학을 들어가 지도 못햇다.

대학생 때는 좋은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 직장인이 되고 나서는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해.

항상 무언가를 향해 달려왔다. 멈추면 뒤처질 것 같았다. 쉬면 안 될 것 같았다.

그 결과가 지금의 나였다.

지쳐 있고, 상처투성이이고, 귀마저 망가진. 거울을 볼 때마다 눈가의 주름이 깊어진 것이 보였다. 이제 마은 후반이다, 마음은 아직 젊은대 이제 늙어버렸다.

어느 날 밤, 노트북으로 사진 폴더를 정리하다가 한 장의 사진 앞에서 멈췄다. 여행 갔을 때 찍은 사진이었다.

그 사진을 보며 생각했다. ‘2023년, 2024년, 2025년.

이 시간을 한 장의 사진으로 표현한다면, 바로 이런 사진일 것 같다.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는, 추락하는, 그런 사진.’

떨어지고 있었다.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바닥이 어디인지도 모른 채. 언제 멈출지도 모른 채.

down

그날 밤, 나는 결심했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다고.

잠시라도 멈춰야 한다고. 숨을 쉬어야 한다고.

떠나기로 한 날

2025년 12월 초, 나는 휴가 신청서를 제출했다.

남은 휴가를 모두 쓰기로 했다.

올해 안에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휴가들. 그동안 아껴두었던, 아니 사용할 여유가 없었던 그 휴가들을 모두 꺼내기로 했다.

그날 저녁, 노트북을 열고 항공권을 검색했다.

어디로 갈까? 제주도? 아니, 국내는 싫었다.

완전히 다른 곳으로 가고 싶었다. 일상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곳.

스크롤을 내리다가 필리핀 보홀이라는 이름을 발견했다.

보홀.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예전에 전화영어때 그쪽에서 보홀 한번놀러와서 즐겨보라던..

아름다운 해변이 유명한 곳이라고 했다.

가격도 적당했다.

클릭, 클릭, 클릭. 결제 완료.

항공권 예약 확인 메일이 도착했다. 2025년 12월 17일 새벽 출발, 12월 21일 귀국. 4박 5일. 혼자.

그렇다. 혼자였다. 친구들에게 같이 가자고 했지만..

펑크.. 나쁜놈(수XXX).

그래 이번 만큼은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보자.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고 싶었다. 혼자서, 조용히. 누군가에게 설명할 필요 없이, 누군가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 없이. 그저 나 자신과 마주하고 싶었다.

여행 준비를 하며 체크리스트를 작성했다.

아 돈 당근을 검색했다.

개인간 거래는 불법이라지만 소액이니…

1차는 페소를 놓고왔단다.. 헛걸음..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추운날 어쨋든 받았다…

여권, 항공권, 숙소 예약 확인서, 옷가지, 세면도구, 수영복, 스노클링 장비… 리스트를 작성하다가 문득 멈췄다.

‘나는 뭘 기대하고 있는 걸까?’

치유? 회복? 답? 아니면 그냥 도피?

잘 모르겠다. 그저 떠나고 싶었다. 여기가 아닌 곳으로.

12월 16일 회사에 반반차를 내고 집으로와서 공항으로…. 캐리어 하나, 백팩 하나. 생각보다 짐이 적었다.

현관문을 나서기 전, 집 안을 한 번 둘러봤다. 와이프는 배웅 해준다 .. 잘다녀 오라고..

공항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창밖을 바라봤다. 간간이 보이는 가로등 불빛. 퇴근시간이 다가와 차는 붐빈다 이 시간, 이 도시에서 떠나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체크인 카운터에 줄을 서며 주변을 둘러봤다. 가족 단위 여행객들, 커플들, 친구들. 모두 누군가와 함께였다. 혼자인 사람은 나뿐이었다.

이상하게 외롭지 않았다. 오히려 편했다. 누구에게 맞출 필요도, 누구를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내 속도로 움직이면 됐다.

출국 심사를 마치고 면세구역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남아 카페에 들렀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하고 창가 자리에 앉았다. 활주로가 보였다. 비행기들이 이륙하고 착륙했다.

저 비행기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저 안에 탄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연착 1시간 항상 연착이다.. 기다림의 연속

탑승 게이트로 향했다. 탑승권을 꺼내 들었다. 좌석 번호를 확인했다. 07C. 통로 자리. 좋았다. 창밖을 보고 싶지 않았다.

ticket

비행기에 올랐다. 좌석을 찾아 앉았다. 짐을 없다. 안전벨트를 맸다.

이륙 준비가 시작됐다. 승무원의 안전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엔진 소리가 커졌다. 비행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활주로를 달렸다. 속도가 빨라졌다. 그리고 순간, 몸이 뒤로 밀리는 느낌과 함께 비행기가 떴다.

옆 사람 사이로 보이는 작은 창..점점 작아지는 건물들, 도로들, 도시. 저녁이라 구름 은 안보인다.

나는 떠나고 있었다. 지난 3년의 시간에서, 그 무거운 기억들에서, 상처들에서. 적어도 잠시만이라도.

보홀에 도착하다

비행기가 보홀 공항에 착륙했을 때는 현지 시간 새벽 2시가 넘었다.

기내에서 내려 입국장으로 향하며 뜨거운 공기가 느껴졌다.

한국의 겨울 추위와는 전혀 다른, 습하고 따뜻한 공기.

입국 심사를 마치고 짐을 찾았다. 공항 밖으로 나가니 예약해둔 차를 타고. 숙소로 기사에게 숙소 주소를 보여줬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낯설었다. 잘보이지는 않지만, 낮은 건물들, 오토바이들, 모든 것이 한국과 달랐다.

20분쯤 달렸을까. 차가 멈췄다. 숙소에 도착했다. 작은 리조트였다. 프런트에서 체크인을 마치고 방 열쇠를 받았다.

방은 2층에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간단한 침대와 책상, 그리고 큰 창문이 보였다. 짐을 내려놓고 잠 지금은 늦었다 일단자자.

혼자라는 것이 외롭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아무도 없었다. 아무에게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다음날 다른숙소로 이동..

ongoing

그저 이 바다를, 이 순간을 느끼기만 하면 됐다. 귓속의 이명 소리는 여전했지만, 파도 소리가 그것을 덮어주는 것 같았다.

‘여기 온 걸 잘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녁을 먹으러 해변가 레스토랑으로 갔다. 테이블을 하나 잡고 앉았다. 뷔페였다. 다양한 음식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와인 바도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접시에 음식을 담았다. 그릴드 씨푸드, 신선한 샐러드, 열대 과일들. 그리고 와인 한 잔을 따랐다. 레드 와인. 잔을 들어 빛에 비춰봤다. 루비빛이 은은하게 빛났다.

테이블로 돌아와 앉았다. 주변을 둘러봤다. 대부분 커플이거나 가족이었다. 혼자 온 사람은 나뿐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신경 쓰였을 것이다. ‘나만 혼자네’, ‘저 사람들은 모두 누군가와 함께인데’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게 자연스러웠다. 혼자여도 괜찮았다. 아니, 혼자여서 좋았다.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부드럽게 목을 타고 넘어갔다. 은은한 과일 향이 입안에 퍼졌다. 그때 레스토랑 한쪽에서 라이브 음악이 시작됐다. 어쿠스틱 기타 소리였다. 부드럽고 따뜻한 선율이 공간을 채웠다.

천천히 음식을 먹으며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가수가 영어로 노래를 불렀다.당연히 한국이 아니니.. 어떤 곡인지는 몰랐지만, 멜로디가 좋았다. 파도 소리와 기타 소리가 어우러졌다.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 끝없이 반복되는 그 리듬 위로 흐르는 음악.

생선은 신선했고 과일은 달콤했다. 와인 한 모금, 음식 한 입. 서두르지 않았다. 시간은 충분했다. 혼자 먹는 저녁이었지만 외롭지 않았다. 오히려 이 고요함이, 이 음악이, 이 순간이 좋았다.

와인 잔을 비우며 연주자를 바라봤다. 눈을 감고 기타를 치는 모습. 음악에 완전히 빠져 있는 것 같았다. 나도 그랬다. 이 순간에 완전히 빠져 있었다.

이 순간을 누군가와 나누지 못하는 게 아쉬울까?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 순간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었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식사를 마치고 해변을 걸었다. 맨발로 모래를 밟았다. 발가락 사이로 모래가 스며들었다. 파도가 발목까지 차올랐다. 차가웠다. 아니, 시원했다.

하늘에는 별이 떴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그렇게 많은 별. 도시의 불빛이 없어서일까. 하늘 가득 별이 쏟아질 것 같았다.

모래사장에 앉았다. 혼자서 궁상을 떨어본다. 무릎을 끌어안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와인의 온기가 아직 몸속에 남아 있었다. 멀리서 레스토랑의 음악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저녁이지만 지나가는 많은 이국의 사람들 . 귀에서는 여전히 이명이 들렸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것도 괜찮았다. 그저 별을 보고, 파도 소리를 듣고, 음악을 느끼고, 바람을 느끼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숙소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오늘 하루를 생각했다. 집을 나서서, 비행기를 타고, 이곳에 도착해서, 바다를 보고, 와인 한 잔과 라이브 음악과 함께 저녁을 먹고, 해변을 걸었다. 그게 전부였다. 특별한 일은 없었다.

하지만 마음이 편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평온함이었다. 언제부터 이런 느낌을 잊고 살았던 걸까.

눈을 감았다. 멀리서 들려오능 음악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렸다. 그리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편안한 잠.

발리카삭으로

다음 날 아침, 알람 없이 자연스럽게 눈이 떴다. 시계를 보니 6시였다.

창문을 열었다. 아침 바다가 보였다. 어젯밤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햇살이 바다 위를 반짝이게 만들었다.

간단히 씻고 아침을 먹으러 나갔다.

숙소 근처 작은 카페에서 커피와 토스트를 주문했다. 테라스 자리에 앉아 천천히 아침을 먹었다.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시간은 충분했다.

오늘은 발리카삭 투어를 예약해둔 날이었다.

발리카삭은 보홀에서 배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작은 섬으로, 스노클링 과 다이빙이 유명한 곳이라고 했다. 거북이도 있고 … 돌고래도 볼수 있단다..어제 숙소에서 돌아오는 길에 투어를 신청했다.

알로나비치 숙소 바로 앞 이라 천천천히 가면된다.

다른 투어 참가자들도 함께였다. 커플 두 팀, 친구끼리 온 세 명, 그리고 나. 모두 외국인이었다.

항구에 도착해 배에 올랐다. 작은 방카 보트였다. 양옆에 대나무로 만든 지지대가 달려 있어 균형을 잡아주는 구조였다.

배가 출발했다. 엔진 소리와 함께 바다를 가르며 나아갔다.

바람이 세게 불었다.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얼굴에 바닷물이 튀었다. 짠 맛이 입술에 닿았다.

다른 사람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웃고 떠들고 사진을 찍었다. 나는 배 끝자리에 앉아 수평선을 바라봤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멀리 작은 섬이 보이기 시작했다. 발리카삭이었다. 배가 속도를 줄이며 섬 근처에 멈췄다.

마스크를 쓰고 핀을 신었다. 다른 사람들이 하나둘 물에 뛰어들었다.

나도 배 끝으로 갔다. 물을 내려다봤다. 깊고 푸른 바다.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뛰어들었다.

따뜻한 물이 온몸을 감쌌다.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고 마스크를 정리했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얼굴을 물속에 담갔다.

그 순간,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산호초가 보였다. 형형색색의 물고기들이 헤엄쳤다. 노란색, 파란색, 주황색, 줄무늬, 점무늬. 영상으로만 보던 그 물고기들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물속은 고요했다. 완벽하게 고요했다. 귀에서 들리던 이명 소리조차 잊었다. 아니, 들리지 않았다. 물속에서는 오직 내 숨소리와 물이 움직이는 소리만 들렸다.

산호초를 따라 천천히 헤엄쳤다. 물고기들이 옆을 지나갔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았지만 닿지 않았다. 그들은 우아하게 움직였다. 방향을 바꾸고, 무리를 지어 헤엄치고, 산호 사이로

숨었다.

햇살이 물속으로 스며들었다. 그 빛 줄기들이 바닥까지 이어졌다. 마치 신이 내려준 빛 같았다.

얼마나 헤엄쳤을까. 시간 감각이 사라졌다. 여기서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됐다. 회사도, 사람들도, 청력 문제도, 지난 시간들도.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이 순간, 이 물속, 이 평화. 그것만이 존재했다.

가이드가 신호를 보냈다. 돌아갈 시간이라는 뜻이었다. 아쉬웠지만 배로 돌아갔다. 배에 올라 마스크를 벗었다.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올라왔다.

모두 흥분해서 이야기했다. 나도 미소를 지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기분을 이해했다.

turtle

거북이와의 즐거운시간을 뒤로하고

배가 다시 출발했다. 돌아가는 길.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가벼웠다. 마치 무거운 짐을 물속 어딘가에 두고 온 것 같았다.

나만의 순간

발리카삭에서 돌아온 후 며칠간 나는 내 리듬대로 움직였다. 아침에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쉬고 싶을 때 쉬었다.

어느 날은 오전 내내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한 페이지를 읽고 창밖을 보고, 또 한 페이지를 읽고 바다를 바라봤다. 누가 빨리 읽으라고 재촉하지 않았다.

어느 날은 오후 내내 호텔 방 침대에 누워 있었다. 천장을 바라보다 잠들고, 깨어나서 다시 누워 있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게 괜찮았다.

어느 날은 해변을 따라 끝없이 걸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그냥 걸었다. 발이 아플 때까지 걸었다. 그리고 비치 벤치에 안자 점심을 먹고 돌아왔다.

beach_02

계획을 바꾸고 싶으면 바꿨다. 해변에 남았다. 누구에게도 미안하지 않았다.

늦잠을 자고 싶으면 잤다. 아침 9시에 일어나기로 했는데 11시까지 잤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아무도 나를 재촉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바다만 바라봐도 괜찮았다. 해변 의자에 앉아 책을 펼쳤지만 한 페이지도 읽지 않았다. 그저 파도를 봤다.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를. 몇 시간이고.

beach_03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혼자 여행하며 알게 됐다. 다른 사람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내가 원하는 대로 하면 된다는 것을.’

여행 마지막 날, 나는 특별한 것을 하고 싶었다. 혼자만의 기억을 남기고 싶었다. SNS에 올릴 ‘인생샷’이 아닌, 나만 간직할 사진. 나만의 순간을 담은 사진.

해변에서 프리다이빙 사진을 찍어주는 사진사를 찾았다. 60분 세션에 사진 10장. 흔쾌히 예약했다.

숨을 깊게 들이쉬고, 천천히 내쉬고, 다시 들이쉬고, 그리고 참는다. 물속에서는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포즈는 생각하지 말고 편한 대로.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하나, 둘, 셋. 그리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물속은 조용했다. 완벽하게 조용했다. 눈을 떴다. 햇살이 물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그 순간, 정말 자유로웠다.

아무 생각도 없었다. 과거도, 미래도, 걱정도, 두려움도. 오직 이 순간만 존재했다. 푸른 물속, 쏟아지는 햇살, 내 몸, 내 숨.

손을 천천히 움직였다. 몸이 떠올랐다. 마치 날아가는 것 같았다. 무중력 상태처럼.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이 느낌을 즐겼다.

물거품이 피어올랐다. 그 거품들이 수면을 향해 올라갔다. 나도 따라 올라갔다. 천천히.

수면을 뚫고 나왔다.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공기가 폐로 들어왔다. 살아 있다는 느낌.

깨달음

여행 마지막 날 저녁, 마사지를 받고 해변을 천천히 걸었다. 석양이 지고 있었다. 하늘이 주황빛, 분홍빛, 보라빛으로 물들었다.

발자국이 모래에 찍혔다. 뒤를 돌아보니 내가 걸어온 길이 보였다. 파도가 밀려와 그 발자국들을 하나씩 지워갔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2023년의 고통도, 2024년의 아픔도, 2025년의 힘듦도. 모두 지나갔다. 아니, 지나가고 있었다. 파도가 발자국을 지우듯이.

이 여행을 통해 조금 알게 됐다. 나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떨어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바닥에 닿았고, 다시 일어섰다. 여기 서 있었다.

귀는 예전 같지 않았다. 여전히 이명이 들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아름다운 것들을 느낄 수 있었다.

파도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완벽하게 듣지는 못했지만, 그 리듬을 느낄 수 있었다.

바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희미했지만, 그 존재를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모든 단어를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그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혼자였지만 괜찮았다. 외롭지 않았다. 혼자라는 것이 고독이 아니라 자유였다.

함께하는 사람이 있으면 좋았을까?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혼자였기에 얻은 것들도 있었다.

나 자신과 마주할 수 있었다. 도망치지 않고. 회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상처 입은 나를. 지친 나를. 두려워하는 나를. 하지만 동시에, 회복하고 있는 나를. 강해지고 있는 나를. 살아가고 있는 나를.

해가 완전히 졌다. 하늘이 어두워졌다. 별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힘든 시간을 지나왔지만, 여기 서 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나는 잘하고 있다.’

이제 떠날 시간이었다.

숙소에서 제공해준 차량을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왔던 길을 거꾸로 갔다. 다시 저녁 야자수들, 낮은 건물들, 오토바이들.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풍경.

공항에서 체크인을 하고 출국 심사를 마쳤다. 탑승 게이트에 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약간은 추웠다.

‘여행은 끝났다.’

하지만 뭔가 달라진 기분이었다.

무엇이 달라졌을까? 외적으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귀는 여전히 이명 소리. 회사로 돌아가면 다시 바쁜 일상이 시작될 것이고, 고민들도 다시 찾아올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달라졌다. 조금. 아주 조금.

천천히,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ticket-02

비행기에 탑승했다. 좌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맸다. 이륙 준비가 시작됐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렸다. 속도가 빨라졌다. 그리고 떴다.

창밖을 내려다봤다. 안녕, 보홀. 감사했어.

2023년, 2024년, 2025년은 힘든 시간이었다. 떨어지는 시간이었다. 추락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2026년은 어떨까?

장담할 수 없었다. 여전히 어려움이 있을 것이고, 고통도 있을 것이고, 외로움도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았다. 나는 할 수 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천천히, 내 속도로.

그리고 무엇보다, 혼자서도 괜찮다. 나에게는 나 자신이 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비행기가 하늘을 날았다. 한국으로, 집으로, 일상으로.

하지만 이제 나는 달랐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조금.

그리고 그 ‘조금’이면 충분했다.

새벽 시간 이라 정신없이 잠에서 깨어나니 인천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아침 이었다. 일요일 아침. 입국 심사를 마치고 짐을 찾았다.

공항 밖으로 나가니 차가운 겨울 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추웠다 다시 겨울이다. 보홀의 후텁 지근한 공기와는 완전히 달랐다. 하지만 이것도 괜찮았다. 이것이 내가 사는 곳이었으니까.

공항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모든 것이 떠나기 전 그대로였다. 당연했다. 겨우 5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달랐다.

휴대폰을 꺼냈다. 보내준 프리다이빙 사진들을 열어봤다.

푸른 물속에 떠 있는 나. 햇살이 쏟아지는 그 순간의 나. 자유로웠던 나.

그 사진을 보며 생각했다. ‘이게 나야. 상처받고, 지치고, 망가졌지만, 여전히 살아있고, 자유로울 수 있는 나.’

사진을 저장했다. 자랑 할 사진. 오직 나만 간직할 사진.

창밖을 내다봤다. 수많은 삶 중 하나. 특별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하찮지도 않은.

노트북을 열었다. 새 문서를 만들었다. 그리고 썼다.

“2026년은 도약을 기대하며…”

up

도약. 그렇다. 이제는 떨어지는 게 아니라 올라갈 차례였다. 천천히, 내 속도로.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상처가 다 아물지 않았어도 괜찮았다. 예전 같지 않아도 괜찮았다.

나는 나였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2026년 1월 1일이 며칠 남지 않았다. 새해. 새로운 시작.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모르겠다.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이제는 두렵지 않았다. 혼자서도 괜찮다는 것을, 나를 믿어도 된다는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보홀에서의 5일은 끝났다. 하지만 그곳에서 얻은 것들은 계속될 것이었다.

2025년도 끝났다

이제 2026년 나는 다시 시작할 것이다.

천천히.

내 속도로.

혼자서.

그리고 괜찮을 것이다.

어느 샌치한 저녁에 …

끝.